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계 중국인 (문단 편집) == 역사 == 19세기 말 [[하얼빈시|하얼빈]]과 [[다롄시|다롄]]에 정착한 이들과 청나라 신장성으로 이주한 백여 명 정도의 정교회 구교도들이 시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하얼빈에서도 [[하얼빈 혁명]]이 발발하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의 본격적인 중국 이민 계기는 러시아 제국에서 발생한 [[적백내전]]이었다. 당시 많은 [[백군]] 난민들 수만여 명이 미하일 이바노프 장군을 따라 20세기 초반 중화민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white émigré)이라고 불렀다. 러시아도 중국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있는 만큼, 러시아인([[슬라브인]]) 뿐 아니라 러시아에 사는 여러 소수민족들도 하얼빈이나 동튀르키스탄 방면으로 망명하였다. 특히 이미 러시아 타운이 구비되어 있던 [[하얼빈시|하르빈]]을 중심으로 대규모 러시아인 난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사 학자였던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도 하얼빈으로 피난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백군 난민의 후손이다.] 하르빈의 러시아 타운은 소련의 [[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자원이라고는 숲 밖에 없는[* 사실 이런저런 광물들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보고는 나왔지만, 이런 자원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소련과 러시아 당국 입장에서야 이미 있는 광산을 개발하기에도 바쁜데 굳이 작은 주의 자원개발에 까지 투자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유대인 자치주에서 나무를 베서 가구를 만들면, 하르빈에 체류하는 다른 유대인들이 이를 밀수하여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에게 판매하는 비즈니스가 번성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발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최초로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러시아계 난민들이었다. > 1931년 9월 10일. 일본 관동군이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근처에서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일주일 전. 하얼빈발 기차에 몸을 싣고 발해 유적 조사를 떠나는 러시아 학자들이 있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후원금을 모아 어렵게 조사단을 꾸렸다. 그들은 소련이 여권 발급을 거부한 ‘백군파(볼셰비키혁명 때 반혁명 입장에 섰던 부르주아 온건파)’였다. 당시 발해 수도 상경성(上京城) 일대는 비적들이 횡행하는 곳이라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주의 역사를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장정을 감행했다. > > 이 발굴을 이끈 대표자가 러시아 고고학자 포노소프(V. V. Ponosov)였다. 그는 1899년 [[우파(러시아)|우파]]시에서 태어나 1922년 하얼빈으로 건너온 뒤 40여 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했다. 당시 하얼빈에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이어받은 당대 최첨단의 고고학자와 생물학자, 지질학자가 많았다. 시민혁명의 여파로 제정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50년 넘게 하얼빈에 거주하며 고고학연구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만주의 역사를 발굴하고 조사했다. > > 그러나 포노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망명자들의 불행한 삶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이용되고 폄하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는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이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동아고고학회’의 등장이 그 단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가 공고히 되자 곧바로 만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1925년에는 그들의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아고고학회를 발족했다. 그 비용은 중국이 지불한 ‘의화단 사건 보상금’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앞장선 동아고고학회는 러시아인의 발굴 자료에 기반, 발해 발굴을 시작한다. > > “만몽(滿蒙)은 한민족의 영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관계가 밀접하다.” > >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그들은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했다. 동아고고학회는 설립 초기부터 발해 상경성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지켜보고만 있다가 만주국이 성립되자마자 곧바로 발굴단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발해고고학은 만주를 일본의 역사에 연결시키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조차 발해 발굴의 효시가 하얼빈의 러시아 발굴단이 아니라 동아고고학회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 > 비운의 학자 포노소프는 동아고고학회가 발해 상경성의 발굴을 독점한 이후 더 이상 발해 연구를 하지 못했다. 포노소프는 일찍이 “상경성은 ‘만주의 폼페이’가 될 것”이라고 중대성을 인식했다. 연차 발굴을 기획하고, 이 ‘만주의 폼페이’가 만주 역사연구에 서광을 비출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이름도 잊혀졌다. > > 1940년대를 전후해 지역 정세가 불안해지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하얼빈의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포노소프는 ‘조사한 자료를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없다’며 중국에 잔류했다. 그리고 1957~61년 중국의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수십 년간에 걸쳐 조사한 유적들을 정리하고 중국인 학자들을 양성한 후에 호주로 이민 갔다. 그가 조사하고 전시한 유물들은 하얼빈시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건물은 그가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호주에선 [[브리즈번]]의 [[퀸즐랜드 대학교|퀸즐랜드대]] 인류학 박물관에 근무하며 호주의 고고학에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한 뒤 1975년 사망했다. >---- >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507768#home|#]] > 백계 러시아인들은 어느 날 일본이 자신들을 도와 소비에트 정권을 전복시키고 러시아의 군주 체제 및 정통 종교를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더욱이 하얼빈과 부근 지역에서는 나타나고 있던 혼란과 [[마적|토비]]들의 만행이 점증하면서 그들은 신분상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좀 더 강력한 통치 주체가 나타나 사회를 안정시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군이 만주에 진주한 이후) 그러한 꿈은 곧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의 만행이 러시아계 이산자들에게 실망과 두려움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만주를 차지한 일본은 하얼빈의 러시아계 기업, 점포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인 고문을 앉히고 그들의 월급을 지급하도록 강요했다. 동시에 러시아인 사회 내의 기차역, 항구, 여관, 커피점 등에 비밀 스파이를 고용해 일본에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이때 ‘반만친소(反滿親蘇)’ 혐의자는 일본 헌병대로부터 고통을 당하거나 구금되었다. 하얼빈의 일본 특무기관에는 [[정치범]]을 위한 [[고문]]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 > 러시아 여성들이 일본군이나 일본 낭인에게 능욕당하거나 [[강간]]당하는 일도 빈발했다. 당시 러시아 부녀자들이 일본군 일본 낭인 헌병 고문 등에게 유린당한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얼빈의 러시아 신문들이 이 사실을 보도하자, 일본 식민 당국은 범죄자에 대해 ‘일본’이라는 글자를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고 만일 위반할 시 정간 폐간 처분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얼빈의 신문에서는 일본인 범죄자를 모두 ‘외인(外人)’으로 표현했다.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01842|출처]]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에도 러시아인 난민들이 대거 정착했었다. 그러나 철도 교통을 통해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던 하얼빈과 다르게 당시 동튀르키스탄은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으며, 난민 대부분은 간쑤성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하거나 [[알타이 산맥]] 부근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성스차이]]의 친소군벌 정권이 신장성을 장악하게 되고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백군 난민 출신 군인들을 지휘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자주 벌어졌다. [[백군|백계]] 러시아 난민들은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에서도 합류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동튀르키스탄에 있던 러시아인들 중 상당수는 적백내전 이전에 러시아로 종교 박해 문제로 이주한 [[고의식파]]들도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에 남아있던 고의식파 신도 상당수는 소련으로 압송되어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한다. 동튀르키스탄에서는 친소 성향 군벌 [[성스차이]]가 집권하면서 백군 난민들이 소련군 측에 강제 징집당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하얼빈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일제의 만주 침공과 만주국 설립 와중에 심한 탄압을 당했으며, [[중일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하얼빈시에 러시아인들은 1936년 들어선 일본군의 생체실험장 [[731 부대]]에 끌려가는 경우가 발생했다. [[731 부대]] 희생자 중 상당수가 하얼빈에서 거주하던 러시아 백군 난민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들이 소련군 전쟁 포로라고 날조하고 있으나 피실험자 상당수가 임신부를 포함한 여성이었다. 출처는 영문 위키의 731 부대 항목과 [[https://en.m.wikipedia.org/wiki/Russian_Fascist_Party|링크 참조 바람]] 이 와중에 하얼빈의 러시아인 상당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상하이를 통해서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의 최종 행선지는 대개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호주]] 등이었다. 당시 [[상하이시]]는 중국과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역사 덕분에, 무일푼으로 망명 온 러시아인들에게 이런저런 일자리가 있었다. 서구인들의 상전 노릇에 질렸던 상하이 시민들 사이에서는 보상 심리로 러시아인 여성들을 무희나 하인으로 부리며 푼돈을 주는 일이 유행했으며, 운이 좋으면 음악인이나 프랑스어 교사 같은 괜찮을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망명은 1937년 상하이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수년간 중지되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끝나고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상하이 내 러시아인들은 굴라크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고 이들을 받아준 것이 호주였다. 당시 호주는 [[백호주의]] 외교 정책을 펴며 아시아 대륙 방면에서의 이민은 이유와 인종을 불문하고 막았으나,[* 심지어 레바논의 백인 기독교인들의 이민조차 막았다.] 상술한 것처럼 미국의 러시아 정교회 측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John_of_Shanghai_and_San_Francisco|#]]] 호주 정부에 탄원을 넣을 것을 계기로 상당수의 러시아 난민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백군 난민들은 소련 여권을 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중화민국 측 역시 자국 영토 내 러시아인들을 자국민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이들은 무국적자 상태에서 [[프리드쇼프 난센|난센 여권]]만 들고 있던 상태였고, 법적으로 아시아인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에서 자국 내 러시아인들을 독자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부터이다.[[https://www.yna.co.kr/view/AKR2014073013070008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